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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특집] ② 시인 윤동주도 축구선수였다
류청 | 승인 2019.08.15 10:59

ⓒ연세대


[풋볼리스트] 류청 기자= 서시(序詩)를 쓴 윤동주 시인(1917~1945)이 축구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난 2015 10, 연변FC(현 연변푸더)를 이끌고 중국 갑급리그(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한 박태하 감독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찾았을 때였다. 박 감독과 함께 용정시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를 찾았는데 해설사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해설사가 박 감독이 윤동주 생가를 찾으니 일종의 맞춤 해설을 들려준 것이다.

윤동주 시인도 당시 다른 이 고장 아이들처럼 축구를 좋아했다.”

윤동주가 한반도가 아닌 당시 간도라 불렸던 용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이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연변에서 돌아온 뒤 사실 확인을 위해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연변 자료를 모두 들춰보다가 멀게만 느껴졌던 윤동주와 축구가 한 번에 나오는 자료를 발견했다. 친동생 윤일주 교수(1927~1985)와 친구 문익환 목사(1918~1994)가 남긴 말과 글이 있었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윤동주의 생애윤일주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하늘바람별의 시인윤동주문익환월간중앙 1976 4월호.

윤동주가 축구를 좋아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는 의미가 크지 않다. 윤동주와 축구 이야기를 함께 하려는 이유는 그 사실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간도는 항일투사와 민족교육자들로 넘쳐났다. 민족교육과 항일투사양성을 위한 학교도 많이 세워졌다. 민족학교에서는 민족교육과 함께 체육교육도 중요하게 여겼다. 축구는 체육과목 중 가장 인기 있었다. 당시 간도와 한반도에서 펼쳐졌던 축구는 현대축구와 인원구성도 달랐고, 경기방식도 조금은 달랐다. 공을 멀리 차는 선수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몸싸움도 더 격렬했다고 한다.

당시 간도 상황을 이해하려면 학교 설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가장 먼저 간도에 조선인 학교를 세운 인물은 이상설 선생(1871~1917)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고 고종에게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이상설 선생은 1906년 간도 용정으로 넘어온다. 그는 1907년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기 전까지 일년 전까지 간도에 머물렀고, 1906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운다. 윤동주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선생(1868~1942) 1908년 화룡현 명동촌에 명동학교를 세웠다. <연변조선족축구운동사> 1920년대 간도 내 학교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꾸린 학교 30외국인선교사가 세운 학교 19중국 측에서 세운 학교 165조선인이 운영한 사립학교가 191개소였다.”

윤동주 모교에 있는 박물관 겸 윤동주 기념관(용정)

김약연이 세운 명동학교는 간도에서 축구를 가장 먼저 시작한 학교로 기록돼 있다. 외삼촌이 세운 명동학교를 졸업한 어린 윤동주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08년에는 연길에 창동학교가 설립됐고, 1910년에는 화룡에 장동학교가 섰다. 이 두 학교도 축구로 이름 높았는데, 모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축구를 배운 조선인 교사(박문호, 노상렬) 덕분이었다. 명동학교와 장동학교는 1년에 2번 정도 친선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 선생은 반일민족애국지사로 그가 초빙한 교원들은 태반이 조선에서 망명해온 반일애국지사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그리하여 명동학교에서는 체육교육을 비교적 중시하였으며 축구운동을 활발히 벌리었다." <연변 조선족 축구운동사>

축구는 그저 단체로 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간도에 있는 조선인이 세운 사립학교들은 민족명절 단오에 함께 모여 연합운동회를 치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집회와 결사 자유가 없었다. 만주 사변(1931) 전까지 간도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모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반일 정서가 표출됐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축구경기를 잘 이용했다. 경기를 치르기 전에는 '광복가'를 불렀고, 경기가 시작되면 '응원가' '한산가'를 불렀다.

"쾌하라 장검을 높이 비껴들었네. /오늘날 우리 손에 잡은 칼은 / 한산도에서 왜적을 격파하던 / 충무공의 칼이 다시 / 번쩍번쩍 번개같이 번쩍 / 쾌한 칼이 나의 손에 빛나네. / 제국의 위업을 떨치누나." (한산가)

1920 10, 일제는 경신참변(중국 마적단을 사주하여 훈춘현 일본영사관을 습격시킨 뒤, 그 일을 빌미로 관동군 약 2만 명을 출병시켜 조선인 3,500여 명을 학살.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 패배 후 보복적 성격이 더 짙어짐)을 일으켰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엄마라고 믿었던 보모가 죽었던 사건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사건이 바로 경신참변이다. 일제는 이때 간도에 있던 조선인 사립학교 30개를 불 태웠다. 하지만 선조들은 굴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축구가 지닌 사회운동적인 성격이 더 두드러졌다. 일제의 감시는 더 교묘해졌지만, 축구경기가 열리면 계속해서 반일적 성격을 지닌 응원가를 불렀고, 독립군들은 쪽지를 주고 받았다. 정강이보호대 안에 쪽지나 연락처를 넣어 주고 받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일제가 감시해도 사람이 (축구장에) 정말 많이 모이니까 독립군끼리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조선족 원로사진기자 황범송)

사진= 풋볼리스트

류청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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