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김정용 기자= “너희들 못 노는구나?”는 가수 길이 한껏 허세에 차 있던 시절 콘서트 관객들에게 했다는 발언이다. 한국인들은 러시아인들을 향해 허세 빼고 당당하게 말해도 좋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나게 놀 줄 모르는 도시다.

러시아는 20일(한국시간) 이곳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집트를 3-1로 꺾고 사실상 16강 진출을 확정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5-0으로 꺾은 뒤 만든 결과다. 경기력이 어찌나 파격적이었는지, 스타니슬라브 체르체소프 감독은 도핑 의혹에 대한 질문까지 받아야 했다. 또 “러시아가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라는 질문도 나왔다. 체르체소프 감독은 두 질문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경기장을 나서며 내가 기대한 건 도시 전체가 광란의 축제로 끓어오르는 모습이었다. 한국인들은 2002년 자국이 월드컵에서 승승장구할 때 나라 전체가 얼마나 들썩거릴 수 있는지 체험했다. 러시아는 월드컵에서 부진하자 폭동이 났던 나라다. 부진할 때 분노가 큰 만큼, 잘 나갈 때는 엄청난 축제가 벌어지겠지? 러시아 전통춤을 추는 사람이 길에 널려 있을까? 흥분한 남녀가 옷을 벗어던지고 춤을 추고 있을까? 도로 위에서 축제가 벌어지면 나는 집에 갈 수 있을까?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러시아 시내는 예상과 달리 조금 시끄러운 정도였다. 경기장을 함께 빠져나온 인파와 함께 고스토니 드보르 지하철역에 내렸다. 번화가에 속하는 곳이지만 광란의 축제는 찾기 힘들었다. “러! 시! 아!”를 외치는 사람이 몇 명 보일 뿐 다들 제갈 길을 따라 이동하기 바빴다. 곳곳에 배치된 경찰 장갑차와 기마경찰, 지하철역마다 이어지는 소지품 검사 등 러시아 당국의 철저한 단속의 영향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모든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정신줄을 놓는 팬페스트에서도 러시아인들은 유독 차분했다.

현재까지 느낀 바로는, 러시아 사람들은 그리 시끌벅적하게 놀지 않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백야가 있는 도시다. 한밤에도 새벽녘처럼 하늘이 어슴프레하다. 관광 안내서에는 “백야 기간에는 밤새 술을 마시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라고 되어 있다. 이 정도를 가득이라고 부른다면 한국의 번화가는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러시아는 대표팀을 응원하는 축구 문화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나라다. 홈 관중들이 외치는 응원은 “러! 시! 아!”라는 삼박자 구호 정도다. 응원가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민요 ‘카튜사’가 전부다. 모든 관중이 동참하는 한국식 문화도, 경기장 곳곳에서 노래와 술로 파티를 벌이는 중남미식 축구 문화도 없다. 러시아 관중들은 비교적 조용하게 경기를 볼 뿐이다. 그래서 이집트전 분위기는 같은 경기장에서 열렸던 이란 대 모로코 경기보다 오히려 차분했다. 일부 관중은 심지어 경기를 거의 보지 않고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지하철은 축제의 장처럼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역은 공산권 국가답게 유독 땅속으로 깊게 내려가 있어서 에스컬레이터가 끝없이 이어진다.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과 내려가는 사람들이 활짝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것도 자주 끊기긴 했지만.

이번 대회는 러시아 국민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소련이 붕괴된 뒤, 러시아는 여섯 번 월드컵에 도전해 세 번은 예선 탈락했고 세 번은 본선에 올랐으나 16강 진출을 하지 못했다. 이번 월드컵은 ‘유로 2008’ 4강 돌풍 멤버들이 대부분 은퇴한데다 예선조차 거치지 않아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 등 기대치가 매우 낮았다.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러시아는 현재까지 최강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어리둥절하다.

러시아는 엄청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16강에 진출하다. 16강 진출 이후 더 큰 축제를 체험한다면, 이번 월드컵은 ‘러시아의 2002년’이 될 것이다. 홈에서 자국 대표팀의 승승장구를 직접 보며 응원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는 계기 말이다. 16강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한결 잘 노는 ‘파티 피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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