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상트페테르부르크] 김정용 기자= 만화 속에 나오는 사이어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입으면 성장이 빨라진다. 손흥민과 기성용은 4년 전에 상처를 입었고, 이제 월드컵이 얼마나 무서운 대회인지 잘 알고 있다.

한국은 13일(한국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스파르타크 스타디움 훈련장에서 팬 공개 훈련을 가졌다. 대표팀은 12일 마지막 전지훈련지였던 오스트리아를 떠나 ‘2018 러시아월드컵’ 베이스캠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첫날 휴식을 취한 뒤 13일, 현지시간 오후 4시경 첫 현지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은 간단했다. 약 40분 동안 몸을 푸는 수준의 저강도 훈련을 한 선수들은 이튿날 시작될 더 본격적인 전술 훈련을 기약하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가장 친절한 구자철을 필두로 선수들은 팬들의 애절한 부름에 응했다. 현지인과 교민 등 250여 명의 팬들에게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인을 해 주고, 사진을 찍었다. 한류가 좋아 찾아왔다는 소녀, 저 선수들이 누군지 잘 모르지만 월드컵 열기를 느끼고 싶어 방문한 소년 등 다양한 러시아인이 있었다.

한국은 위기론 속에서 러시아에 도착했다. 한국이 월드컵 선수단을 소집한 뒤 치른 A매치는 참가국을 통틀어 가장 많은 4경기다. 결과는 1승 1무 2패로 부진했다. 대표팀 경기에 쉽게 실망하는 건 어느 나라나 비슷한 현상이다. 한국의 월드컵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넘어 ‘우린 안될 거야’라는 염세주의가 팽배하다.

월드컵을 처음 경험하는 신태용 감독은 염세주의 한가운데서 밝은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이 구역의 긍정왕’이다. 한국이 부진한 경기를 반복할 때도 “유쾌한 반란을 보여주겠다”며 신 감독은 긍정 에너지를 잃지 않았다. 13일 기자회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차전 로드맵을 다 만들었다", ”(스웨덴 공격수들은) 세컨볼 싸움만 잘 해주면 문제없이 막을 수 있다“ 등 긍정적인 발언이 쏟아졌다.

이승우, 문선민도 월드컵 본선에 처음 참가하는 선수들답게 긍정적인 기운이 넘쳤다. 이들은 아직 월드컵의 두려움을 모른다. 이승우는 “스웨덴은 충분히 뚫을 수 있다”, “부담감은 없다. 항상 축구를 즐기고 싶다”라고 말했다. 문선민은 한 발 더 나아가 “스웨덴전에서 골만 잘 넣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손흥민과 기성용의 말은 ‘월드컵 1회차’인 선수들과 달리 조심스럽다. 주장 기성용과 에이스 손흥민은 모두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이 창피한 세 경기 끝에 탈락할 때 주전이었던 선수들이다. 성적 부진뿐 아니라 도덕성 논란이 있었고, 대표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식는 계기였다. 당시 월드컵에 처음 나갔던 손흥민에게도, 2010년 대회에서 16강 진출을 이끌었던 기성용에게도 브라질월드컵은 치명타였다.

“2014 월드컵 출전 당시는 지금 대표팀에 있는 승우와 (황)희찬이 나이였다. 자신감이 많았다. 3경기 모두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변화가 있다. 걱정과 설레임이 교차한다.”

기성용 역시 “결과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자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월드컵은 선수 인생에서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소중한 기회다.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 자신을 표현했으면 좋겠다. 부담감 있고, 결과가 잘못 되면 힘든 게 사실이지만 월드컵에 나왔다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하고 이 대회를 즐기자는 쪽으로 얘기했다”라고 했다.

한국 대표팀을 열심히 응원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극적인 이변을 바란다. 이날 훈련장에서 교민들의 응원을 지휘한 배중현 씨는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장소가 의미심장하다고 말했다. “기자들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스웨덴으로부터 러시아가 빼앗은 땅이다. 그리고 독일이 침공했을 때 레닌그라드 공방전 끝에 러시아가 결국 지켜낸 땅이다. 스웨덴과 독일이 패배한 곳이라는 점에서 우리 대표팀이 그 기운을 받아갔으면 한다. 그래서 베이스캠프가 여기인 것 아니겠나.” 역사와 미신을 묶어 어떻게든 한국의 승리를 상상해보려는 축구팬의 마음이다.

손흥민도 월드컵의 두려움을 아는 만큼 그 매력을 잘 알고, 이변을 꿈꾼다. “자신감이 상당한 차이를 만든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기에 임해야 한다. 전세계 언론의 주목이 기분 좋은 건 사실이다. 경기장에서 보여줘야 한다.”

늘 태연한 태도를 보이려 노력하는 신 감독도 종종 불안감을 드러낼 때가 있다. 신 감독은 국내 일정을 소화할 때부터 휴대전화 촬영에 민감했다. 이날 기자회견도 여러 취재기자가 휴대전화로 찍었다. 질의응답을 마친 신 감독은 가장 오래 촬영하고 있던 ‘풋볼리스트’를 향해 “그것 좀 안 찍으면 안 될까. 방송 카메라보다 더 부담스럽다”라고 요청했다. 대외적으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사실 신 감독도 예민한 월드컵을 치르고 있다.

기성용과 손흥민을 비롯한 대표 선수들은 월드컵이 주는 부담과 공포를 끌어안고 더 높은 차원에서 정신적인 준비를 하고 싶어 한다. 대표팀 주축 선수들의 신중함과 이승우, 문선민의 천진한 패기가 조화를 이룬다면 한국은 가장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월드컵을 치를 수 있다. 한국은 14일부터 본격적인 전술 훈련을 통해 18일 스웨덴전을 준비한다. 구체적인 훈련 내용은 공개되지 않을 예정이다.

사진=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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