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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포항] 김정용 기자= 레오가말류는 한국에서 뛴 첫 경기에서 2골을 넣었고, 초반 9경기에서 4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년 전, 가난한 가족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첫 테스트 경기에서도 그는 골을 넣었다.

말컹(경남FC), 제리치(강원FC) 등 뛰어난 외국인 공격수가 즐비한 올해 K리그1에서 레오가말류는 독특한 존재감이 있는 선수다. 32세인 레오가말류는 더 젊고 활기찬 장신 공격수들에 비해 느려 보인다. 너무 느긋한 것 아니냐는 불만이 생길 때쯤, 골대 근처에서 벼락 같은 슛으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준다. 침착하고 기술적인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와 비교하는 별명이 생겼다.

 

서드파티와 반항심에 발목 잡힌 왕년의 유망주

그에게 직접 들어본 축구 선수로서의 경력은 다채로웠다. 레오가말류는 12세 때 축구를 시작했다. 동네에서 축구를 가장 잘 했지만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축구화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세 치수 큰 삼촌의 축구화를 빌려 신고 뛰었다. 엄청나게 불편했지만 늘 하던대로 골을 넣을 수 있었고,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 팀이 그레미우였다. 그레미우는 포르투알레그리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팀 중 하나다. 레오가말류는 처음부터 재능이 있었다.

레오가말류의 아버지는 아들의 입단이 결정된 뒤 “너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시내로 데려가 축구화를 하나 사 줬다. 첫 축구화였다. 집안 사정을 잘 아는 레오가말류는 브라질의 저가 서민 브랜드인 스트라이키 제품을 골랐다. 검은 축구화에 흠집이 나면 구두약을 칠해가며 신었다.

유소년 선수로서 순조롭게 성장하던 그는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16세 때부터 경력이 꼬였다.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 번째는 에이전트였다. 당시 브라질에서 성행하던 서드 파티(선수 소유권을 본인이나 구단이 아닌 제3자가 행사하는 경우) 계약을 맺은 것이 문제였다. 레오가말류를 산 회사는 아르헨티나 명문 리버플레이트로 보냈다. 거기서 1년을 보낸 레오가말류는 다시 고향의 명문팀 인테르나시오날로 이적했다. 셋 다 남미를 대표하는 명문이긴 하지만 이리저리 오락가락하며 성장할 타이밍을 놓쳤다. 지금도 레오가말류의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시기다.

두 번째 문제는 레오가말류 자신이 재능에 비해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유 없는 반항심 때문에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나태한 나날을 보냈다. 한 달 내내 훈련 시간보다 지각하는 바람에 벌금이 쌓여 월급이 통째로 사라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 이젠 웃으면서 “다른 선수들에게 이야기해줄 만한 교훈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10대 시절에는 나름대로 심각한 반항이었다.

19세였던 2005년, 큰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유소년팀에서 레오가말류의 투톱 파트너는 나중에 유럽에서 맹활약하게 되는 루이스 아드리아누였다. 두 선수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유소년 초청 대회 ‘트로페오 도세나’에서 인테르나시오날의 우승을 이끌었다. 레오가말류는 4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1군에도 종종 소집됐다. 그러나 탈장 수술을 받으며 컨디션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레오가말류는 2006년 다른 명문팀 보타포구로 이적하게 된다. 인테르나시오날은 레오가말류가 떠나자마자 남미의 챔피언스리그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FIFA 클럽월드컵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아드리아누는 이때 좋은 모습을 보여 유럽에 진출했다. 레오가말류가 잡지 못한 기회였다.

 

○○의 이브라히모비치

인테르 시절부터 구단에서 아파트가 나오고, 월급과 별도로 가족들에게 생활비가 지급되면서 레오가말류는 집안의 가장이 됐다. 축구 선수로서 대성할 기회를 놓친 뒤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선수 경력을 이어갔다. 2008/2009시즌 포르투갈 3부 구단 발데베스 소속으로 FA컵 8강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했고, 이를 계기로 중국으로 이적해 두 시즌 동안 활약했다. 포르투갈에서 받던 연봉의 10배를 받으며 고수익을 올린 뒤 브라질로 돌아갔다. 이후 2011년부터 포항에 올 때까지 10번이나 이적을 했다.

어느 팀에 있든 레오가말류는 긴 머리를 고수했다. 중국 진출 시절 ‘중국에서 긴 머리는 일본인 같아 보인다. 역사적인 악감정 때문에 팬들이 싫어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 스타일을 바꿨다가 브라질로 돌아간 뒤 다시 길렀다. 대단한 이유가 있진 않았다. 늘 긴 머리가 좋았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이브라히모비치다. 당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대표적인 장발 스타였다. 2013년 세에라 소속일 때 헤어밴드를 했는데 경기 중 자꾸 빠졌다. 감독이 “그 머리 좀 밀어”라고 잔소리를 하자 레오가말류는 깎기 싫으니 대신 질끈 묶겠다고 대답했다. 머리를 위로 묶은 모습이 결정적으로 이브라히모비치처럼 보였다.

그 뒤로 레오가말류의 별명은 ‘○○의 이브라히모비치’가 됐다. 연고지가 북쪽인 산타크루스에서 뛸 때는 ‘북방의 이브라히모비치’라는 뜻의 ‘이브라 두 노르데치’라는 별명이 생겼다. 2015년 아바이 소속일 때는 홈 구장 이름을 따서 ‘이브라 두 헤사카다’로 불렸다. 레오가말류는 이 이야기를 하며 “이젠 한국에 왔으니까 이브라 두 코레아(한국의 이브라히모비치) 아니겠나”라며 웃어보였다.

그는 베르바토프와 빗댄 별명에 대해 “정말 좋은 선수니까 팬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건 고맙다. 그러나 비슷한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베르바토프는 더 기술적이고 몸싸움을 꺼리는 편이다. 반면 레오가말류 자신은 헤딩골 비중이 높아서 그만큼 몸싸움도 많이 해야 한다.

언니라는 별명에 대해서도 “좋다”며 웃었다. 그는 통역과 마주보고 “일마, 일마(irma)”라며 킥킥 웃었다. 브라질 남자들은 대체로 한국 남자보다 성 정체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한 편이다. 남자에게 언니라는 말을 하거나 여성스럽다는 말을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레오가말류도 기분 좋게 별명을 받아들이는 한편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야 좋다”라고 조건을 붙였다.

한국과 인연을 만들어가는 중

레오가말류와 K리그의 인연은 동료들을 통해 먼저 생겼다. 한국을 오가는 브라질 선수가 워낙 많기 때문에 K리거 친구 한두 명쯤 있는 건 흔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레오가말류의 경우는 특이했다. 2013년 세아라 소속일 때 K리그 출신인 마그노와 모타, 나중에 K리그로 가게 될 룰리냐가 모두 한 팀에 있었다. 그중 모타와 룰리냐는 레오가말류보다 먼저 포항에서 뛴 ‘선배’들이다. 당시 레오가말류가 주전 공격수였고 모타, 룰리냐가 뒤를 받쳤다. 이 멤버가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상승세를 주도했다. 레오가말류는 K리그와 포항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들을 수 있었다.

포항이 레오가말류를 영입하려 했을 때, 마침 그도 브라질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그의 전 소속팀인 고이아스에서도, 당시 소속팀인 폰테프레타에서도 선수와 팬이 자주 싸웠다. 공항에서 선수 한 명이 팬들과 직접 싸우기도 했다. 환멸을 느낀 레오가말류는 덜 거칠고 우호적인 환경에서 뛰고 싶었다. 요즘 K리그에서 가장 홈 구장 분위기가 좋은 포항은 그에게 잘 맞는 팀이다.

‘포항의 이브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내와 아이다. 한국으로 온 두 번째 이유는 아들이 “아빠, 일본으로 이적하면 안돼?”라고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아들 가비는 브라질에서도 초밥을 좋아했다. 아빠 따라 본토의 맛집을 가보고 싶다는 천진한 생각에 이적을 권했다. 일본은 아니지만 가까운 나라로 간다는 것이 레오가말류에게도 마음에 들었다. 아내는 아이들과 일본 디즈니랜드에 가려고 여행 계획을 짠다.

가비의 입맛은 금새 ‘한국화’됐다. 이제 초밥보다 한국식 고기집을 더 좋아한다. 가족과 함께 부산에 놀러갈 때도 뒷자석에 앉은 가비는 “아빠, 나 한국식 고기집 데려간다고 했지? 안 가면 아빠는 거짓말쟁이야”라고 계속 확인을 시도했다. 만 다섯 살에 불과하지만 직접 고기를 굽는 능력을 익혔기 때문에 레오가말류는 편하다. 이야기가 아들 자랑으로 넘어가자, 레오가말류는 “가비가 축구교실에 다니는데 잘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슬쩍 축구 이야기를 얹었다.

레오가말류는 여러 번 물어도 개인적인 목표를 말하지 않았다. “난 언제나 팀의 목표가 곧 내 목표라고 대답한다. 내가 골을 많이 넣어도 팀이 강등권에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K리그는 전북이 항상 1등이다. 전북을 잡으러 가는 게 목표다. 포항 선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인 뒤 나중 일을 생각하겠다.”

그는 포항에서 보낼 2018년이 끝까지 잘 풀릴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처음에 약간 놀랐다. 패스와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감독이 주문한 움직임을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잘 구현한다. 골을 향해 만들어가는 과정이 다른 팀보다 좋다. 이런 스타일의 팀이라면 내 장점을 보여줄 수 있다.”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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