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이탈리아세리에A는 13년 만에 한국 선수가 진출하며 다시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수비 축구의 리그라는 통념과 달리 많은 골이 터지고, 치열한 전술 대결은 여전하다. 세리에A와 칼초(Calcio)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김정용 기자가 경기와 이슈를 챙긴다. 가장 빠르고 가장 특별하게. <편집자 주>

다니엘레 데로시는 한때 자제력이 부족해 AS로마 동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선수였다. 이젠 한결 성숙해진 자세로 축구를 대한다. 프란체스코 토티가 은퇴한 뒤 팀의 새로운 상징이 되면서 데로시의 참을성과 상대 선수에 대한 자세가 바뀌었다.

로마는 25일(한국시간) 영국의 리버풀에 위치한 안필드에서 ‘2017/2018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UCL)’ 4강 1차전을 치른다. 이 경기를 위해 리버풀을 찾은 로마 선수단은 경기에 앞서 경기장에서 헌화 의식을 치렀다.

데로시는 로마 대표로 힐스보로 참사 희생자들에게 꽃을 바쳤다. 힐스보로 참사는 1989년 4월 관중 96명이 영국 FA컵 경기에서 사망한 사건이다. 안필드 한쪽에 참사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추모의 장소가 마련돼 있다. 데로시는 선수단과 함께 추모비 앞에 애도의 화환을 바쳤다.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토티도 양복 차림으로 선수단과 함께 예를 갖췄다.

 

‘퇴장왕’은 없다

경기를 앞두고 리버풀 주장 조던 헨더슨은 같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같은 주장인 데로시를 높이 평가했다. 헨더슨은 “데로시는 환상적인 선수이자 환상적인 리더다. 그는 거대한 선수이며, 이번처럼 큰 경기의 경험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시즌만큼은 헨더슨의 말이 맞다. 데로시는 로마가 UCL 출범 이후 처음으로 4강에 오르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선수 중 한 명이다. 지난 16강 2차전에서 샤흐타르도네츠크를 1-0으로 꺾고 역전승을 거둘 때 과열되는 경기 속에서 중심을 잡으며 훌륭한 운영 능력을 발휘했다. 8강에서 바르셀로나를 만난 로마는 1차전에서 1-4로 대패했고, 데로시는 이때 자책골을 넣었다. 그러나 홈에서 3-0으로 바르셀로나를 꺾고 역전을 달성했을 때는 1골 1도움을 비롯한 맹활약을 펼쳤다.

큰 경기에서 쉽게 무너지곤 했던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데로시는 뛰어난 선수지만 승부처에 약하다는 로마 주장들의 나쁜 전통을 계승한 선수였다. 7살 선배인 토티 역시 젊은 시절에는 치기어린 행동을 많이 하며 퇴장을 자주 당하는 악동이었다. 토티는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거친 플레이를 많이 줄였지만, 토티에 비하면 어렸던 데로시는 비교적 최근까지 좌충우돌했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전이었으나 대회 초 퇴장당해 4경기 출장 정지를 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로마에서도 퇴장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요한 경기에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경기력이 저하되는 고질병도 있었다.

이번 시즌은 토티가 은퇴한 뒤 치르는 첫 시즌이다. 데로시는 로마에서만 뛰어 왔지만 무려 35세 나이에 드디어 공식 주장이자 최고참으로서 후배들을 이끌게 됐다. 데로시는 최근 정신적으로 한층 강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번 시즌 UCL을 보면 로마는 승부처에 약한 팀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조별리그에서 첼시를 잡고, 토너먼트에서 두 번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으며 ‘한 골 승부’에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데로시는 이번 시즌에도 한 차례 퇴장을 당했다. 지난해 11월 제노아를 상대한 세리에A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 잔루카 라파둘라를 팔로 가격해 퇴장과 함께 페널티킥을 내줬고, 로마는 이 상황이 빌미가 되어 1-1 무승부에 그쳤다. 데로시는 이 경기 후 “동료, 감독, 팬들께 정말 미안하다. 할 말이 많지 않다. 추한 장면이었다”라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변명은 없었다.

 

할 말은 하는 데로시, 로마의 리더다운 모습으로

데로시는 경기장 밖에서도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기보다 ‘할 말은 하는’ 좋은 이미지를 쌓아나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이탈리아 대표팀의 ‘2018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이 좌절됐던 유럽 플레이오프 2차전이 대표적이다. 데로시는 승리가 절실한 상황에서 몸을 풀라는 지시를 받자 코치에게 “나 말고 (로렌초) 인시녜를 투입하라고”라는 고함을 질러 화제를 모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선 오히려 그럴만 했다는 반응이 우세했다.

경기 후 스웨덴 선수들을 찾아간 행동도 화제를 모았다. 스웨덴 선수들은 이탈리아 홈 관중의 심한 야유에 시달렸다. 경기 후 데로시는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팀 버스에 올라가 관중들의 무례한 행태를 대신 사과했다. 스웨덴 대표 폰투스 얀손은 “내가 실제로 겪어본 일 중 가장 좋은 순간 중 하나였다. 데로시는 대단한 신사”라고 말했다. 이번에 힐스보로 참사 희생자들에게 꽃을 바친 것도 데로시의 달라진 모습과 일맥상통했다.

리더의 침착한 성격은 로마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교묘하게 승리를 추구하는 이탈리아 팀 가운데서 로마는 유독 우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요령이 없고 무식하다는 이미지가 있다. UCL 4강에서 가장 약한 팀으로 꼽히는 로마가 이변을 만들려면 더 냉정하게 승리를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데로시에게 주어진 짐이다.

데로시가 경기를 대하는 자세는 4강 1차전의 승자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변수이기도 하다. 로마는 16강, 8강 모두 원정 경기에서 고전해 왔다. 리버풀에 비해 베테랑이 많은 로마가 침착하고 냉정하게 실리를 챙길 필요가 있다. 그러지 못하고 허둥거리다 리버풀의 압박에 당한다면, 로마는 다시 한번 1차전 대패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AS로마 트위터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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