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나폴리(이탈리아)] 김정용 기자= 나폴리는 지저분한 경기장에서 깔끔하고 우아한 축구로 정상을 지킨다.

11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나폴리에 위치한 스타디오 산파올로에서 ‘2017/2018 이탈리아세리에A’ 24라운드를 치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대팀 라치오는 3위를 노리는 팀 중 하나다. 최근 리그 2연패 중이지만 선두 나폴리로서도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결과는 싱거웠다. 나폴리는 라치오를 4-1로 크게 꺾으며 3연패 수렁으로 빠뜨렸다.

나폴리는 이름난 관광지인 동시에 폭력과 빈곤으로 알려진 고장이다.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히는 산타 루치아에서 지중해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들지만, 그만큼 많은 관광객이 위험하다는 소문에 발길을 돌린다. 나폴리는 도시 전체가 그라피티로 덮여 있다. 서민 주거지역, 혹은 우범지역의 상징처럼 된 페인트 스프레이는 나폴리의 벽을 넘어 동상에까지 빼곡하게 칠해져 있다.

산파올로도 페인트 스프레이로 뒤덮여있기는 마찬가지다. 6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데다가 종합경기장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산파올로는 멀리서부터 방문객을 압도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손이 닿는 모든 벽과 구조물에 빼곡하게 페인트로 낙서가 그려져 있다. 일부 벽에는 말 그대로 낙서 수준이고, 다른 벽에는 울트라스(서포터)가 자신들의 상징을 그려 놓았다. 경기장 주변을 걷는 동안 발바닥에서 와작 소리가 났다. 깨진 병 조각을 밟는 소리다.

산파올로는 너무 큰데다, 1층의 시야각이 나빠 2층으로 올라가야 경기를 즐길 수 있다. 관중 대부분은 콩알만 한 선수들을 봐야 한다. 평범한 기준으로 볼 때 좋은 관람 환경은 아니다. 나폴리 서포터는 경기장에 맞는 응원 문화를 만들었다.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북쪽 스탠드와 남쪽 스탠드는 각각 ‘쿠르바 A’와 ‘쿠르바 B’라고 불린다. 두 스탠드를 모두 나폴리 팬들이 점령한 상태에서 각각 별도로 응원을 한다. 나폴리 팬끼리 응원 대결을 하는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구석에 틀어박힌 원정팀 서포터들은 아예 잊힌다.

나폴리의 명성대로 응원 문화는 거칠었다. 열기와 폭력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쿠르바 B의 관중들은 왼쪽 아래에서 응원하고 있는 라치오 서포터에게 불을 붙인 홍염을 던졌다. 원정 서포터를 보호하는 그물이 쳐져 있기 때문에 사람이 직접 맞을 일은 없지만 위협하는 효과는 충분하다. 쿠르바 A는 경기장에서만 흉흉한 게 아니다. 나폴리의 악명 높은 마피아 고모라의 일원들이 들어와 마약을 팔고, 여러 분파끼리 충돌하는 장으로 이용된다는 보도도 있었다. 물론 음흉한 거래는 경기장 구석에서 이뤄지는 정도고 대부분의 팬들은 선량하지만 성난 나폴리 시민이다.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여전히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나폴리 시내, 경기장에서 흔들리는 깃발, 경기 기념 스카프에 마라도나의 얼굴이 있었다. 괴짜이고 좌파인 마라도나는 나폴리 시민들에게 딱 맞는 ‘서민의 챔피언’이었다. ‘1990 이탈리아월드컵’ 준결승이 나폴리에서 열리자 일부 관중이 이탈리아가 아닌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응원한 일화는 유명하다. 심지어 나폴리에 위치한 델라 폴리아 미술관은 ‘고야부터 마라도나까지’라는 제목으로 마라도나의 왼발 사진을 예술 작품들과 함께 전시 중이다.

지저분한 공간과 흥분 상태인 관중들과 달리, 그라운드 위는 지적이었다. 나폴리와 라치오는 전술의 나라에서도 가장 전술이 인상적인 팀에 속한다. 나폴리는 4-3-3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각 선수들 사이에 삼각형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며 상대를 붕괴시킨다. 섬세하고 정교하다. 반면 라치오는 3-5-1-1에 가깝다. 경기장을 넓게 쓰며 롱 패스를 통해 공격을 전개하는 것이 라치오의 방식이다. 나폴리는 트리덴테(스리톱), 라치오는 3-5-2라는 세리에A의 두 가지 유행을 대표하는 팀이기도 하다.

라치오의 선 굵은 공격은 전반 3분 센터백 스테판 더프라이가 오버래핑 해 올린 공이 그대로 나폴리 골문에 들어가는 행운 덕분에 일찍 결실을 맺었다. 여기까지는 선수들이 공간을 고루 배분하고, 크로스를 잘 활용하는 라치오 전술의 승리였다. 라치오의 거친 수비도 잘 먹혔다. 그러나 경기가 무르익어갈수록 주도권을 잡은 팀은 나폴리였다.

마우리치오 사리 나폴리 감독은 전술에 대한 확신이 강하다. 나폴리 특유의 플레이를 반복하다보면 상대가 결국 나가떨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진 팀이다. 나폴리는 계속 삼각 대형을 만들며 공을 돌렸다. 라치오 선수들이 쫓아가다가 한계를 느끼면 최소한 미드필더 한 명은 수비의 견제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됐다. 이 선수가 좋은 스루 패스를 날리면, 스리톱 중 한 명이 반드시 침투했다. 라치오는 나폴리의 공격을 간신히 끊어낼 수 있을 뿐 완벽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한 번만 놓쳐도 실점으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전반 43분 거대한 경기장이 진동했다. 나폴리 식 공격이 마침내 성과를 냈다. 조르지뉴 특유의 로빙 스루 패스가 날아갔고, 라치오 수비수들의 발이 땅에 붙어 있는 사이 오른쪽 윙어 호세 카예혼이 침투했다. 카예혼은 달려나오는 토마 스트라코샤 골키퍼 옆으로 가볍게 공을 차 넣어 득점했다. 골 세리머니를 할 때 경기장은 말 그대로 쾅쾅 울렸다. 모든 관중이 한 목소리로 “카예혼”을 외치자 공기가 부르르 떨렸다.

후반전은 더 급격하게 나폴리 쪽으로 경기가 기울었다. 후반 9분 라치오 수비수 왈라스의 자책골도, 후반 11분 마리우 후이의 골도 나폴리 전술이 더 좋아 나온 장면이었다. 나폴리가 역전하고 또 점수를 벌리는 동안 라치오는 점점 무기력해졌다. 나폴리의 작지만 많이 뛰는 선수들이 공간을 다 선점하고 있는 가운데 볼 키핑이 약점인 치로 임모빌레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테크닉으로 맞불을 놓을 수 있는 루이스 알베르토는 부진한 경기 끝에 일찍 교체됐다.

이미 흥분한 나폴리 팬들에게 우월감을 주는 장면이 두 번 나왔다. 후반 24분 로렌초 인시녜, 후이, 피오트르 치엘린스키가 좁은 공간에서 패스를 돌리며 라치오 선수 4명의 압박 가운데 공격권을 지켰다. 경기장이 들썩였다. 후반 38분에 예술적인 경기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나왔다. 미드필드에서 압박으로 공을 빼앗은 나폴리는 드리블과 삼각 패스를 섞어서 순식간에 라치오 문전까지 진입했다. 중앙 미드필더면서 윙어 수준의 공격력을 가진 치엘린스키가 ‘헛다리’ 드리블로 라치오 수비를 농락한 뒤 수비수들 사이로 패스를 톡 집어넣었고, 이 공간으로 달려든 드리스 메르텐스도 공을 톡 차 넣었다. 나폴리 팬들은 우월감에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감정 표현에 더없이 솔직한 나폴리 사람들은 행복한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관중들은 더러운 경기장에서 줄담배를 피운 뒤 꽁초를 바닥에 내던지고 껄껄 웃었다. 기자들도 응원하는 팀의 슛이 빗나가면 책상을 걷어차며 화를 냈다. 보통 경기가 끝나 가면 일찍 떠나는 관중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쿠르바 A 서포터들은 선수들이 다가와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까지 거의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고, 일부는 30분 넘게 관중석에 남아 승리감을 만끽했다. 산파올로 주위 쇠락한 동네에는 경기 후 한잔 할 만 한 공간이 부족하다. 축구로 우월감을 느끼려면 경기장에 더 오래 남아있어야 했다. 트로이세 치로 나폴리 전문 기자는 처음 만난 한국인에게도 오래 남으라고 권했다. “우리 5월 20일쯤 되면 우승할 건데 그때까지 여기 있어. 우승하는 거 보고 가야지!”

사진= 풋볼리스트,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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