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월드컵의 해다. '풋볼리스트'는 러시아에서 한국과 경기할 3개국의 축구 문화를 다양한 시각에서 해부한다. 행정, 전술, 관중문화 등 주제를 가리지 않고 독자 여러분께 흥미로운 내용을 전달해 드릴 예정이다. <편집자 주>

주젭 과르디올라 맨체스터시티 감독은 지금과 같은 전술 철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 멕시코에서 공부를 했다. 첫 번째는 공부한 장소가 멕시코였다. 2005년, 현대식 4-2-3-1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출신 후안마 리요 감독이 멕시코 구단 도라도스 데시날로아를 지도하고 있었다. 과르디올라는 현역 생활을 마무리할 겸, 지도자 수업을 받을 겸 리요의 아래로 들어갔다. 이때 멕시코는 그저 자소였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준 건 멕시코 축구 특유의 ‘라볼피스모(Lavolpismo)’다. 1990년대부터 멕시코 축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축구 철학을 말한다. 라볼피스모의 계승자들은 리카르도 라볼페 감독을 존경하고, 그 축구 스타일을 참고하곤 한다. 라볼페의 영향을 받은 감독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과르디올라다.

 

라볼페가 창시한 5-3-2 공격축구

라볼페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지만 사실상 멕시코 축구인이다. 선수 시절 아르헨티나 대표까지 올라갔던 라볼페는 37세 나이에 멕시코로 건너가 아틀란테, 오악테펙에서 현역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 41세에 은퇴하자마자 오악테펙 감독으로 부임한 뒤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끝에 2002년 멕시코 대표팀에 부임하며 당대 멕시코 축구계 최고 명장이 됐다.

2004년 멕시코가 사상 처음으로 아르헨티나를 꺾었을 때, 라볼페가 조국에 패배를 안겼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는 멕시코의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아르헨티나 리그로 복귀한 시기도 있었지만 역시 주무대는 멕시코였다. 2016년 클럽아메리카를 이끌고 클럽월드컵에 참가했다. 이때 전북현대를 꺾고 4강에 진출했다.

공격을 중시하는 라볼페 감독의 철학은 아르헨티나의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감독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르헨티나 감독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아름답고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하는 루이스 메노티의 후계자들, 그리고 실리주의적인 카를로스 비야르도의 후계자들로 나눌 수 있다. 라볼페는 메노티의 철학에 자신만의 전술을 접목했다.

라볼페 축구의 가장 특이한 점은 5-3-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공격 축구를 하는 것이다. 파이브백 중 한가운데, 미드필더 중 한 가운데 있는 선수가 중심을 잡는다. 그러면 두 명의 스토퍼와 두 명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넓은 범위를 장악한다. 이들의 뒷받침을 받고 좌우 윙백이 과감하게 최전방까지 전진한다. 공격 상황에서는 사실상 3-3-4로 전환되는 시스템이다.

 

과드리올라, 신태용이 구사한 ‘라볼페식 빌드업’

라볼페식 공격 축구의 핵심은 윙백의 수비 부담을 줄이고 공격에 최대한 가담하도록 하는 것이다. 골키퍼로부터 ‘전방의 윙백’까지 공을 보내는 부분 전술이 잘 정립돼 있다. 리베로 성향의 최후방 수비수가 빌드업을 시작해 측면으로 공을 보내면, 거의 미드필더처럼 전진해 있는 윙백을 중심으로 패스를 순환시키며 전진한다. 상대 수비진까지 전진할 확률이 높을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상대 수비를 교란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 편은 스리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 역습에 당할 위험이 적다.

이 빌드업 방식이 약간 변형돼 세계적으로 퍼진 것이 ‘라볼피아나’다. 의역하면 ‘라볼페의 방식’ 정도 된다. 과르디올라 감독 시절 바르셀로나가 좋은 예다.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후방으로 내려가 골키퍼에게 짧은 패스를 받는다. 이때 두 센터백이 좌우로 벌려 부스케츠와 함께 스리백을 형성한다. 센터백들이 측면 수비 공간으로 이동하면 풀백은 앞으로 전진한다. 이렇게 파이브백 형태를 만들면 좌우 윙백에게 안정적으로 공을 전달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위력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라볼피아나는 후방부터 짧은 패스로 공격을 풀어나가려는 팀들이 즐겨 쓰는 모범 전술로 자리 잡았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과 ‘2017 U-20 월드컵’ 당시 신태용 감독도 라볼피아나를 꾸준히 시도했다. 당시 신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의 박용우 등 후방 빌드업이 좋은 수비형 미드필더를 기용해 역삼각형 미드필더를 꾸리려 했다. 4-3-3에서 박용우가 뒤로 내려가면 5-2-3이 된다. 후방에 많은 숫자를 배치한 채 측면으로 공을 보내고, 윙백의 전진과 함께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를 공략할 수 있다.

현 멕시코 역시 라볼페의 영향력 아래 있다

5-3-2 포메이션은 이후 멕시코 축구의 대표적인 전술이 됐다. 멕시코에는 이 전술에 맞는 선수들이 유독 많이 배출된다. 파이브백의 스위퍼뿐 아니라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소화하며 2000년대 바르셀로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멕시칸 카이저’ 라파엘 마르케스가 대표적이다. 멕시코 센터백 중에는 엑토르 모레노처럼 비교적 키가 작지만 스피드가 빠르고 패스가 정확한 선수들이 많다. 라볼페식 축구에 맞는 스타일이다. 윙백, 윙어, 역삼각형 미드필드에서 왼쪽에 치우친 미드필더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안드레스 과르다도 역시 라볼페식 축구에 맞는 인재다.

멕시코의 여러 감독들이 이 전술을 꾸준히 계승해 왔다. 2015년 북중미골드컵 우승을 이끈 미겔 에레라(2013~2015) 감독이 대표적이다. 당시 멕시코의 포메이션도 5-3-2였다. '1998 프랑스월드컵‘ 당시 한국을 상대한 공격수로 더 익숙한 콰우테모크 블랑코는 선수 은퇴 후 정계로 나섰지만, 나중에 감독이 된다면 라볼피스모를 따르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현재 대표팀을 이끄는 후안 카를로스 오소리오 감독은 ‘라볼피스타’는 아니다. 일단 멕시코가 아닌 콜롬비아 태생이다. 그러나 4-3-3과 5-3-2 포메이션을 병행하며 라볼페식 축구의 여러 요소를 멕시코 대표팀에서 구현하고 있다. 재미있는 건 최근 신 감독이 한국에서 시도했던 ‘포어 리베로’는 라볼피아나와 비슷하면서도 작동 방식은 반대라는 것이다. 신 감독은 ‘수비할 땐 스위퍼, 공격할 땐 미드필더’라는 역할을 장현수에게 맡겼다. 라볼피아나에서는 거꾸로 ‘수비할 땐 미드필더, 공격할 땐 스위퍼’인 선수를 배치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묘한 ‘한 끝 차이’ 승부에 강한 멕시코 전통

멕시코 축구의 또 한 가지 특징은 한 끝 차이 싸움에 강하다는 것이다. 멕시코는 신체조건도 기술도 세계 최고가 된 적이 없지만 오랜 축구역사를 통해 나름의 경쟁력을 길렀다. 아슬아슬한 승부에서 좀처럼 밀리지 않고, 높은 확률로 이득을 보는 축구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U-23 대표팀도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한 것이 아니라 매 경기 조금씩 우세한 승부를 반복해가며 정상까지 갔다. 심지어 브라질을 만났을 때도 이 축구가 통했다.

한국은 1998년 당시 ‘첫 승 제물’이라던 멕시코와 그리 밀리지 않는 경기를 하는 듯 보였으나 결과는 1-3 패배였다. 2016년 클럽월드컵에서 정상 전력이 아니었던 클럽아메리카는 전북과 팽팽한 경기를 벌였지만 역시나 승자는 멕시코 축구였다.

러시아월드컵을 준비하는 멕시코는 어느 때보다 전력 손실이 많은 팀이다. 유럽에 대거 진출하며 황금세대를 약속했던 카를로스 벨라, 하비에르 에르난데스, 도스산토스 형제 등 간판 스타급 공격진 대부분이 주전 경쟁에서 밀렸거나 유럽 바깥으로 탈출했다. 심지어 손흥민을 가진 한국을 부러워할 정도다. 그러나 객관적 전력이 다소 떨어졌더라도 멕시코는 멕시코다. 미묘하게 이득을 보는 특유의 경기 방식이 살아있는 한 늘 껄끄러운 상대다.

글= 김정용 기자

사진= 전북현대 제공,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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